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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으면 다시 또 잘려나간 발가락 하나(소록도에 있는 한하운 시비) [고광석 이야기산책]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뒤에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소련 군정이 시행되면서 함흥의 지주였던 한하운의 집안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민의 처지로 전락했다. 그때부터 한하운의 남동생은 김일성 정권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집 창고에 무기와 탄약을 숨겨 두었다. 한하운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치고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하려던 한하운의 동생은 1947년 4월 3일 보안대원들에게 연행되었다. 한하운도 체포되어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한하운은 잘 먹지 못한 데다가 날마다 취조를 받고 고문을 당해 나병이 재발하였다. 한하운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가 대구, 부산 등지로 돌아다니며 치료약을 구한 다음 겨울에 다시 북으로 돌아온다. 그는 동생의 행방을 찾아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허가를 받지 않고 이남에 갔다 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여름 한하운은 목숨을 걸고 형무소를 탈출하였다. 한 달간 맨발로 걸어 38선 너머 한탄강에 도착하였지만 이남 땅에는 한하운을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북 땅을 밟지 못하였다. 한하운이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은 결국 가족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한하운은 사랑하는 가족이 없는 남한 땅을 떠돌다가 소록도로 가면서 쓴 시 <전라도 길>에서 당시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길> 소록도는 나병 환자를 집단으로 수용하고 치료하는 시설이 있는 곳이다. 한하운은 천안을 지나 전라도의 끝인 소록도로 가고 있다. 황톳길을 걸어가다가 나무 밑에서 쉬며 신발을 벗으면 어느 틈엔가 다시 또 잘려나간 발가락 하나……. 이제 남은 발가락은 두 개밖에 없다.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발로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을 걸어갈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하운은 1949년 5월에 <전라도 길>을 비롯한 시 25편을 묶어 첫 시집 《한하운 시초》를 발간하였다. 한하운의 시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남쪽 문단에서 그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병 증세는 이미 얼굴에까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 문인들은 그를 마주치기만 하면 외면했고, 작품을 들고 잡지사에 찾아가면 원고를 만지는 것조차 꺼렸다. 그래도 한하운은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55년과 1957년에 각각 시집 《보리피리》,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출간하였다. 또한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을 설립하여 자치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나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1960년엔 나병이 음성이라는 판정을 받으면서 더욱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였는데, 1968년 나병을 치료하기 위한 투약으로 간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라고 노래했던 시인 한하운은 1975년 2월 28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그의 시비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세워져 있다. 소록도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0절, 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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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높고 쓸쓸한[고광석의 이야기산책] 외롭고 높고 쓸쓸한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무소유》를 읽은 뒤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 대원각이 있던 자리에 세운 절이다. 《무소유》를 읽고 법정 스님에게 1,000억 원대의 땅과 건물을 기증한 대원각 주인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김영한은 개화사상을 지닌 어머니 덕분에 중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만 당시에 불어닥친 광산 바람이 그녀의 행복을 앗아가 버렸다. 금광사업을 하는 할머니의 친척이 자금을 마련하려고 그녀의 집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바람에 집안이 망해버린 것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김영한은 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열여섯 살에 결혼을 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채 6개월도 안 되어 남편이 우물에 빠져 자살한 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딜 수 없어 친정으로 돌아온다. 김영한은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열여섯 나이로 조선의 권번(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던 말)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조선 권번의 설립자인 금하 하일규는 희망하는 소녀들을 따로 모아서 가무를 가르쳤다. 그녀는 하일규에게 가곡, 궁중 가무를 배운다. 노래와 춤 솜씨가 뛰어났던 김영한은 파인 김동환이 발행하는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며 ‘문학 기생’으로 주목받았다. 김영한은 기생 생활을 할 때 신문지에 한글을 반복해서 쓰며 글씨 연습도 하고 시조를 외우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소문이 나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글씨 쓰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기도 하였다. 그중에 해관 신윤국이 그녀를 가상히 여겨 1935년에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김영한은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다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그녀는 신윤국이 수감되어 있는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그러나 면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낙담한 그녀는 함흥에 머물러 살게 된다. 김영한은 어떻게 해서라도 면회할 기회를 잡기 위해 고심하다가 함흥 권번으로 들어간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참석한 함흥 법조계의 유력 인사를 만나서 특별 면회를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신윤국이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면회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그 무렵에 김영한은 함흥 영생고보(영생고등보통학교)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만난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어느 날 백석은 김영한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김영한은 백석이 지어준 ‘자야’라는 이름을 그 무엇보다도 진귀하고 소중한 선물로 여겼다. 백석은 1936년 4월에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영생고보의 학생들은 선생으로 부임한 백석이 지나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려고 야단이었다. 영생고보 제7회 졸업생 김희모는 백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백석을 처음 본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백석 선생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는 ‘모던보이’의 모습으로 최고의 멋쟁이 그대로였다. 그의 옷차림은 두 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달린 당시 최첨단의 산뜻한 감색 더블이었다. 넥타이도 옆으로 비낀 줄무늬였고, 머리는 뒤로 넘긴 ‘올백’형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시인 백석은 왜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고집했던 것일까? 왜 비싼 양복을 입으면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외모를 꾸미는 데 지출했을까?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위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거만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백석 특유의 올백형 헤어스타일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청산학원에서 백석은 다른 여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본어는 잘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고고한 헤어스타일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했다. 그 외모에는 일본에 대한 굽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백석은 양복을 입고 멋을 내어 일본을 능가할 멋과 지성이 조선에도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의복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는 돈을 아끼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백석을 존경한 제자가 만든 노래 ‘스승의 은혜’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같이”로 시작하는 <어린이 노래>는 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인 강소천이 작사한 곡이다. 강소천은 영생고보를 다닐 때 스승을 더 보고 싶어 졸업을 미룰 정도로 백석을 흠모하였다. 백석은 노래하듯이 높이고 낮추는 방식으로 시 낭독을 하였다. 강소천은 백석의 시 낭송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시를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강소천은 백석 시인에게 영어와 문학의 깊이를 배웠으며, 백석의 모든 시를 줄줄 외울 만큼 백석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백석 또한 강소천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백석의 지도와 격려로 강소천은 시와 소설, 동시와 동요 들을 짓게 되었다. 강소천은 동시와 동요를 지으면서 스승 백석의 말을 평생 마음에 새겼다.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 나라말을 후세에 이어 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길이다.” 강소천은 1941년에 동시집 《호박꽃 초롱》을 펴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과 마찬가지로 동시 33편을 수록하였다. 그는 청진 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강소천은 1963년에 사망할 때까지 북에 있는 스승을 늘 그리워했지만 남북 분단으로 ‘백석’이라는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자신이 만드는 동요에 백석의 시를 넣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백석을 존경하고 사랑한 제자로서 강소천은 스승의 은혜를 노래로 만들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1,000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 1987년 10월에 백석의 시를 오래전부터 남달리 아끼고 사랑해온 이동순이 《백석 시 전집》을 펴냈다. 백석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김영한은 이동순에게 전화를 한다. 이동순을 만난 김영한은 20대 초반, 어여쁘던 처녀 시절에 함경도 함흥에서 시인 백석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후 서울 청진동의 작은 집에서 혼례를 치르지 않은 부부로서 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영한은 이동순의 권유로 1995년에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하였다. 김영한은 1955년에 서울 성북동의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을 짓고 한식당으로 운영하다가 요정으로 개조했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1960~70년대 밀실 정치가 펼쳐진 국내 3대 요정 중 하나였다. 최고급 요정 대원각은 유명 정치인들과 일본 총리들도 드나들던 곳이었다. 김영한은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1995년 땅이 7천 평, 건물이 40동으로 시가 1,000억 원대에 해당하는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맡겼다. 드디어 1996년 12월 14일 길상사가 개원하였다. 길상사의 개원 법회가 열리던 날, 김수환 추기경도 직접 법정 스님을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1933년 일본에서 유학할 때 백석의 거주지는 동경의 길상사 1875번지였다. 백석의 하숙집이었던 길상사를 기억하고 있던 김영한은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면서 이름을 길상사로 짓게 된다.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 내리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간직하며 살던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기부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한다. 죽기 열흘 전 자야 김영한은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라고 대답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자야가 죽는 순간까지 그리워했던 백석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살다가 1996년 1월 7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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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의 삶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 세계[고광석의 이야기산책] 무욕의 삶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 세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교육을 받으며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천상병의 서울대 상대 동기생인 친구 강빈구도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독일(통일 전 서독) 유학을 마치고 와서 서울대학교에 전임교수로 있었는데 천상병과 자주 어울렸다. 강빈구는 은행가의 아들로 돈 씀씀이가 좋아서 대학 시절부터 천상병이 하숙비도 얻어 쓰는 사이였다. 천상병을 특별히 좋아하고 믿어서 숨기는 것이 없는 그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에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천상병은 강빈구한테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막걸리 값으로 오백 원에서 천 원씩 받았다. 이런 일들이 중앙정보부 자료에는 천상병이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돈을 받고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둔갑했다. 천상병의 죄명은 반공법상 불고지죄와 형사법상 공갈죄였다. 친구가 북한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아서 불고지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 절친한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술값으로 100원 또는 500원씩, 2년 동안 모두 3만여 원을 뜯어냈다는 것이다.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세 달 동안 물고문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고문을 당한다. 결국 그는 전기고문 세 번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풀려난 천상병은 다시 세 달 동안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살아 있을 때 유고시집이 발간된 시인 천상병은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폐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동백림사건 이전에 천상병은 독설로 선배 문인들을 곧잘 골탕 먹이는 날카로운 신예 비평가였다. 시도 쓰고 비평문도 쓰고 짧은 번역도 해서 더러는 친구들 밥값이며 술값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로 그는 사람이 달라졌다. 신경림 시인은 당시의 천상병 시인에 대해 술은 여전했으나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목순옥의 오빠 목순복은 천상병의 친구였다. 목순옥이 여고 2학년 때 오빠의 소개로 명동의 갈채다방에서 천상병을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다. 천상병은 목순옥을 친동생처럼 데리고 다녔다. 연극이나 영화표가 생기면 함께 구경했고 빈털터리가 되면 목순옥에게 차비를 받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순옥은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동백림사건이 터지고 천상병이 실종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순옥은 일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고문의 후유증에다 잦은 폭음으로 건강이 엉망이 되어서 부산의 형님 댁에 내려갔다가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목순옥을 찾아왔는데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기를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는데, 그날 갑자기 천상병이 사라졌다. 목순옥과 헤어진 날 밤에 술에 취해서 거리에 쓰러져 있는 그를 경찰이 발견했다. 자신을 시인 천상병이라 말하면서도 시를 한 줄도 못 외우는 것이 경찰로서는 너무 이상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를 경찰은 행려병자로 간주하여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천상병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1971년 여름부터 몇 달 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자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친구들은 천상병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여겨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다. 천상병은 살아 있으면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담당 의사는 이 유고시집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보고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천상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해 주었다. 목순옥은 천상병이 실종 기간 내내 병원에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를 찾아간다. 그녀가 매일 병문안을 하며 간호한 덕분에 고문의 충격과 술병으로 40킬로그램이었던 천상병의 몸무게는 60킬로그램으로 불어났다. 시립병원장 김광해(담당 의사)는 목순옥이 천상병 시인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 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한다. 그때 목순옥은 천상병과 결혼할 결심을 한다. 나중에 목순옥은 “가진 것은 병과 가난밖에 없는 남자, 그것도 철없는 아이 같은 남자와 왜 결혼할 생각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시 만났을 때 고문 후유증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그의 시만큼 그의 성정도 정말 맑고 천진한 사람이어서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제가 돌봐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다. 마흔세 살 노총각 천상병과 서른여섯 살 노처녀 목순옥은 1972년 5월 14일에 김동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술과 담배, 친구를 좋아하는 천상병의 성품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살림형편이 어려워져 생계 걱정을 할 때 천상병의 친구인 강태열 시인이 300만 원을 빌려줘서 인사동 골목에 ‘귀천’이란 찻집을 열었다. 천상병 시인의 작품 제목을 따서 이름을 지은 ‘귀천’은 예술인, 작가, 언론인,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21년간 부부였지만 천상병은 목순옥에겐 아기였고 천사였다. 매일 아침 세수시키고 손발톱도 깎아주고 목욕을 시켜주면서도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모든 것을 다 바칠 대상이 있다는 게 행복했다. “인생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소풍 온 것” 1988년 천상병은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친구가 의사로 근무하는 춘천의료원에 입원하는데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목순옥은 병원에서 천상병에게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찻집 일을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차 안에서 목순옥은 매일 기도했다.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요.’ 천상병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나더니 정확히 5년 뒤에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의 장모는 장례 때 받은 조의금 840여만 원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민하다가 아궁이에 숨긴다. 그곳에 숨겨두면 도둑이 훔쳐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바로 여름이 그다지 멀지 않은 4월 말이었다. 그런데 목순옥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까봐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다음날 아침에 천상병 시인의 장모는 돈이 잘 있나 확인하려고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를 뒤적였다. 거기에는 불에 탄 돈 쪼가리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타다 남은 돈 쪼가리와 재를 긁어모아 한국은행으로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실수로 조의금이 불에 탄 사실을 인정해 400여만 원을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욕을 얘기하듯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천상병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 <귀천>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1996년 5월에 천상병의 <귀천>을 읽다가 멈칫했다. 죽는 일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토록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시인의 말은 내게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를 읽고 나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의 말줄임표를 멋진 삶으로 채워 넣고 싶어졌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에서 시인은 생명을 빼앗기거나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표현했다. 또한 인생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소풍 온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귀천>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천상병 시인이 아니고서는 쓰기 어려운 시이다. 오철수 시인은 《시가 사는 마을》에서 <귀천>을 이렇게 평하였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무욕의 삶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 세계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삶 자체가 욕심 덩어리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그 욕심을 하나 둘 버릴 때 사람은 점점 순수해지고 맑아지고, 나와 세계의 거리는 점점 투명해져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되나 봅니다. 이 시에서처럼 인간에게 가장 힘든 고통이라는 죽음마저도 소풍쯤의 거리로 되어버리니 말입니다.” 1993년 4월 28일,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그날은 뿌연 안개 속에 찬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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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록들[고광석의 이야기산책] 우리나라에서 며칠 동안 계속 내린 눈이 쌓인 최고 기록은 1962년 293.6cm이고, 하루 동안 쌓인 기록은 1955년 150.9cm가 최고이다. 두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곳은 오징어의 고향 울릉도이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기록이 많다. 세계에서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곳은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으로 100년에 두세 번 잠깐 비가 내린다. 이곳은 약 2천만 년 동안 건조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매년 평균 강수량이 0.01cm도 되지 않는다. 어떤 지역은 400년 이상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아타카마 사막의 대부분은 불모지대이지만 놀랍게도 100만 명 이상이 이곳에 살고 있다. 안데스 산맥에 쌓인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 덕분에 오아시스 마을들이 제법 발달해 있는 데다가 구리, 초석 등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사람은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의 ‘로버트 퍼싱 와들로우’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술을 받았는데 뇌에 이상이 생겨 성장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생후 4개월부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키는 163cm, 열 살 때 키는 196cm였다. 그는 1918년 2월 22일에 태어나 1940년 7월 15일에 사망해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다른 거인들이 보통 230~240cm였는데 그의 키는 무려 272cm였다. 손바닥 길이는 32.4cm, 발 크기는 47cm였고, 양팔을 벌린 길이가 288cm로 키보다도 더 컸다. 세계에서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여자는 러시아 사람 ‘표도르 바실리예프’의 부인으로 16번의 쌍둥이, 7번의 세 쌍둥이, 4번의 네 쌍둥이를 포함하여 모두 69명을 출산했다. 《기네스북》에 최다 자손 보유자로 기록된 모로코의 마지막 황제 무레이 이스마일(1672~1727년)은 5백여 명의 처첩들로부터 아들 544명과 딸 340명을 합하여 모두 888명의 아이를 낳았다. 한 번에 가장 많은 쌍둥이를 낳은 사람은 브라질 여인으로 1946년 4월 22일 남자아이 5명, 여자아이 10명인 15쌍둥이를 출산했다. 미국의 '어네스트 하우젠'은 죽는 날까지 33년간 닭털 뽑기 챔피언이었다. 최고기록은 1939년 1월 19일에 세웠는데 4.4초당 한 마리를 뽑았다. 세계에서 몸무게가 제일 많이 나간 사람은 미국 워싱턴 주의 '존 브로 미녹'으로 635kg이었다. 그는 살을 가장 많이 뺀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419kg을 감량했다. 세상에서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사람은 멕시코 태생 난쟁이 '루시아 자라테'로, 17세 생일 때 키 67cm 몸무게 2.13kg 20세 생일 때는 몸무게 5.9kg이었다. 가장 오래 딸꾹질을 한 사람은 미국 아이오와주 출신의 ‘찰스 오스본’으로 1922년 12월부터 1990년 2월까지 67년 3개월간 1분당 20~25번의 딸꾹질을 했다. 세계적인 탭댄서 ‘마이클 플레틀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발의 소유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1초에 35번 바닥을 칠 수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 있는 바이칼호수는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1,730m에 이른다. 호수의 남북길이는 636㎞이고, 넓이는 남한의 1/3이다. 워낙 크다 보니 호수 안에 섬만 22개가 있다. 가장 큰 섬이 올혼섬인데, 면적이 700㎢로 서울보다 넓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가정에 수돗물 공급이 중단된다고 가정했을 때, 인류는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며 40년 동안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바이칼호수는 물속 43m까지 지름 30cm의 접시가 보일 정도로 깨끗하다.